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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텃밭작물 이야기 ■/◆텃밭정보 그리고 농사정보

고구려 전통음식/차좁쌀밥/차좁쌀떡/멧돼지고기/맥적

by →다솜네텃밭 2022.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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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적 : 오늘날의 불고기. 주로 멧돼지고기
고구려병 : 시루에 찐 떡종류. 차좁쌀떡
김치 : 고추가 들어가지 않은 절인 배추나 아욱
차좁쌀밥, 기장밥
간장 : 지금과 같이 콩메주로 담근 간장
곡아주 : 고구려의 술

 

 



* 예시 1

고구려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고추나 감자.,고구마등이 조선시대에 와서 외지에서 들어온 만큼 오늘날 우리가 즐겨먹는 음식을 먹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지금 먹지 않는 것도 먹었을 것이고, 또 지역이 다양한 만큼 먹거리도 다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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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류]

고구려인이 즐겨 먹었던 곡식은 지역적인 특성상 조와 콩이 대표적이었고 보리,밀,기장,수수 등도 먹었다.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은 물론 요동반도와 간도 지방에서도 쌀이 재배된 만큼 귀족들을 중심으로 쌀밥을 먹기도 했다.

 

 

식사법은 쌀 이전에 유래된 보리나 조, 수수 등은 낟알이 단단하여 쉽게 익지 않았고, 이 때문에 가루를 내어 토기에 물을 붓고 가열함으로써 죽을 만들어 먹는 방법으로 식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기는 물러서 장시간 음식을 넣고 가열하면 흙 냄새가 베어 좋은 식기가 될 수 없다. 이러한 토기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 시루였으며, 시루로 곡물을 찌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안악3호분 벽화에 그려진 주방그림에서 시루로 음식 만드는 모습이 이런 변화를 보여준다. 또한 디딜방아로 곡식을 으깨는 장면과, 약수리고분 벽화에 키질하는 장면이 있어 곡식류가 고구려인에게 가장 중요한 식량이었음을 알게 된다.
고구려 지역은 콩의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콩으로 만든 된장 등은 중국에도 널리 알려졌고 일본에도 전해졌다.

[고기류]

중국의 [수신기(搜神記)]라는 책에는 맥반(貊盤)이라는 식탁과 맥적(貊炙)이라는 음식이 귀족 집안과 부잣집에서 즐겨 잔치에 나오는 그릇과 음식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여기서 맥적은 불고기 요리의 전신으로 고구려의 대표적인 고기 음식이라고 여겨진다.
style="background-color: #ffffff; color: #000000;">가축으로 키운 소,돼지,양,닭,개등을 육식으로 이용했다. 특히 돼지는 제사에 쓰기 위해 국가에서 관청을 두고 길렀을 만큼 중시되었다. 소 역시 제사에 쓰이기도 했으며, 농사에도 활용하고 있었던 만큼 고구려 사람들에게 주요한 식량이었다. 고분벽화에는 외양간에 여러 마리의 소들이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신라인들이 고구려인을 수탉으로 비유했다는 기록을 보면 닭 역시 많이 사육되었던 것 같다.
고구려인의 생활에서 사냥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만큼, 멧돼지,사슴, 토끼, 꿩을 매달아 놓은 그림도 있다. 가축류를 제외하고도 노루와 꿩 등도 주요한 음식이 되었다. 푸줏간에 쇠갈고리로 노루, 돼지, 닭, 꿩을 매달아 놓은 그림도 있다. 가축류를 제외하고도 노루와 꿩 등 야생동물이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사냥을 통한 식량조달의 비중이 꽤 높았던 것 같다.
고구려인이 육식을 즐겨했다는 것은 다음의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구려 10대 산상왕은 그의 형수였던 9대 고국천왕의 부인인 우씨왕후의 방문을 받는다. 산상왕은 왕후에게 잘해 주려고 친히 칼을 들고 고기를 썰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상하자 왕후가 치마끈을 출어 그 손가락을 싸매준다. [한원]에는 고구려인이 "허리에 백색 띠를 두르며 왼쪽에는 갈돌을 달고 오른쪽에는 오자도(五子刀)를 패용한다"고 했다. 산상왕이 든 칼은 오자도로 볼 수 있다. 사냥을 통해 즉석에서 고기를 잡아 오자도로 썰어 먹거나, 식탁에서 오자도로 고기를 썰어 먹는 것은 고구려인들에게는 흔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육식 역시 곡류와 더불어 고구려인의 주요한 식량이었다. 지역에 따라 육식이 곡류보다 더욱 중요한 식량이 되었다. 특히 서북쪽 초원지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양, 염소 등과 양, 낙타, 말 등의 젖을 주식으로 했다. 이들은 오늘날 몽고 등지의 유목민들처럼 말린고기와 치즈같은 유제품을 자주 먹었을 것이다. 동북쪽 삼림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노루나 꿩, (멧)돼지 등과 민물고기를 많이 먹었을 것이다. 특히 돼지는 동북쪽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고 한다.
또한 각종 민물과 바다 생선류도 주요 음식이었다. 고구려는 동해안에 자리한 동옥저에게서 바다고기와 해초류, 소금 등을 상납받기도 했다.

[채소류, 기타]

#000000;">고구려에서 재배된 채소로는 부루와 아욱이 전해진다. 부루는 천금채라고 하며 수나라에서도 그 종자를 얻으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밖에 쑥, 무, 배추 등을 재배했다. 문헌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김치도 먹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물론 고추가 들어있지 않은 소금에 절인 배추나 아욱일 것이다. 초기에는 단지 채소를 소금에 절여 먹었지만, 후기에 들어서는 양념으로 마늘, 파, 생강이 곁들여진 것으로 추측되며, 겨울이 춥고 긴 고구려에서도 김치는 필수적인 음식이었다.
고려시대에 양념 김치가 등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로 김치는 조선 초기에 소금 대신 젓국을 사용하고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전래되면서 오늘과 같은 김치가 된 것이다.
과일로는 복숭아, 배, 밤, 오얏등이 재배되었다.
또한 차와 제사 때 꼭 필요한 각종 술과 꿀 등도 먹었을 것이다. 특히 술은 고구려인들이 잘 빚었다고 한다.
양념으로는 웅녀가 먹었던 마늘과 파, 소금, 각종 장류와 젓갈류 등이 이용되었다.
고분 벽화에는 우물에서 물 뜨는 모습, 주방에서 음식을 나르는 모습, 귀부인에게 차를 드리는 모습, 곡식을 시루에 넣고 조리하는 모습등 식생활과 관련된 그림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무영총에는 주인과 손님이 담소하는 모습 뒤편으로 그릇에 가득 담은 과일이 그려져 있다. 중국인들은 자기들이 먹는 좋은 식기류인 조두(俎豆)라는 것을 오직 동쪽 고구려 등지에서만 사용한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것을 보더라도 고구려 사람들의 식생활은 대단히 발달했다.

 

 

http://my.netian.com/~ulpang/고구려풍속.htm


* 예시 2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輯安] 루산[如山]의 남쪽에는 5세기 후반의 것으로 알려진 고구려 고분이 한 기 있다. 이 고분에는 각각의 벽면에 당시 고구려인의 삶과 세계관을 볼 수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28~29쪽 그림 참조) 특히 오늘날도 최신의 패션에 속할 것 같은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은 14명의 남녀가 대열을 짓고 춤을 추는 모습이 그려진 벽화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던 고구려인들의 실제 모습을 짐작케 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이 고분을 ‘무용총(舞踊塚)’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고분에는 동벽에 이 무용도가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북벽에는 접빈도, 서벽에는 수렵도가 그려져 있다. 그야말로 무덤 주인공이 손님을 맞이하면서 음악과 무용, 그리고 수렵을 즐긴 모습을 무덤 안의 벽화에도 남겼다. 특히 북벽의 접빈 장면에는 당시 고구려의 귀족들이 음식생활을 어떻게 했는지를 상세히 알려주는 정보가 가득하다.
접빈도 벽화에는 여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상을 두고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주인이고 맞은 편에 앉은 두 사람이 손님이다. 두 사람의 손님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서 승려이거나 도교의 도사(道士)일 가능성이 많다. 나머지 세 사람은 하인으로 보인다. 두 하인은 주인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데 비해 가운데 무릎을 꿇은 하인은 음식을 접대하고 있다. 특히 그 크기를 주인과 손님에 비해 작게 그려 그가 음식 시중을 드는 하인임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주인과 손님 사이에는 음식상이 각각 3개씩 모두 6개가 있다. 주인 앞에 놓인 음식상에는 그릇이 모두 5개이다. 주인 가까이 있는 그릇 하나는 다른 것에 비해 크다. 분명히 밥을 담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인의 주식은 쌀밥이 아니라 차좁쌀을 시루에 찐 차좁쌀 밥이었다. 혹은 기장쌀로 밥을 짓기도 하고 마[土著〕를 갈아서 좁쌀가루와 섞어 죽을 만들어 주식으로 먹기도 했다.


고구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 음식, 멧돼지 구이

 


그런데 주인의 밥상 앞에서 하인은 칼을 들고 시중을 들고 있다. 아마도 고기로 만든 음식이 주인의 상에 차려진 모양이다. 여름에 잡은 멧돼지를 통째로 간장에 절여 항아리에 넣어둔 것을 꺼내서 여기에 마늘과 아욱으로 양념을 한 후 그것을 숯불에 놓고 굽는다. 이 요리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다. 간이 깊게 배어 있고 구워낸 맛이 고소해서 이웃 중국에도 소문이 났다. 중국의 기록에는 이 고기음식을 ‘맥적(貊炙)’이라 적었다. 즉 맥족이 먹는 고기구이란 뜻이다. 오늘날의 너비아니와 비슷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음식은 너무 오랫동안 구워도 안 되고 덜 구워도 맛이 없다. 집에서 기른 돼지나 사냥을 해서 잡은 멧돼지를 잡아 항아리에 넣어 간장에 절인 이 육장(肉醬)을 손님이 오면 꺼내서 구워냈다. 특히 고구려인들은 노루·소·개 따위의 고기도 좋아했지만 돼지고기를 더욱 즐겨 먹었다. 당시 제천행사에서 조상신령에게 바쳐지는 제물 중 통돼지는 으뜸에 들었다.
고구려의 맥적이 맛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간장 맛 때문이다. 대두(大豆)의 원산지가 바로 고구려 땅이기 때문에 가을에 콩을 삶아서 메주를 만드는 일은 당시에도 매우 흔한 일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둥근 공 모양으로 만든 메주를 방안의 화덕 가까이 두고 그 위에 차좁쌀 짚을 덮어두면 금세 메주 주위에 곰팡이가 붙었다. 봄이 되면 지금의 원산 근처에 있었던 옥저에서 구입해온 소금으로 메주를 띄워서 간장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간장은 사냥을 가서 잡아온 노루나 멧돼지의 살코기를 절이는 데 쓰였다. 아마도 이 맥적이 시중 드는 하인 쪽 그릇에 담겨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만약 손님이 승려나 도사일 경우 이 맥적이 그들의 상에 놓였을 리가 없다. 그 대신에 아욱을 간장에 절인 장아찌가 놓이지 않았을까?
밥상 위에는 두 개의 다른 상이 놓여 있다. 발이 세 개 달린 상에는 입이 좁은 병이 놓였다. 아마도 중국에서 수입한 칠기로 된 목기 술병이 아니었을까? 고구려인들은 평소에 차좁쌀로 밥을 지어먹기도 했지만, 술을 만드는 데도 차좁쌀은 좋은 재료가 되었다. 먼저 차좁쌀을 디딜방아에서 곱게 빻아 가루를 낸다. 이 가루를 미지근한 물에 반죽을 한 후 시루에 앉혀서 떡이 되게 찐다. 이렇게 삶아 낸 차좁쌀 떡을 식힌 후 손으로 다시 반죽을 한다. 충분히 다진 후 그 위에 말린 메주에서 떼어낸 가루를 넣고 물을 간간이 부어가며 손으로 반죽을 하며 이리저리 잘 섞는다. 이것을 항아리에 넣고 우물에서 떠온 깨끗한 물을 부어 뚜껑을 꼭 덮고 화로 옆에 한 달쯤 두면 술독 맨 위로 맑은 청주가 떠오른다. 이웃 중국의 기록에는 이 술을 곡아주(曲阿酒)라 부르면서 고구려 술이라 적고 있다. 술병의 왼쪽에 놓인 상에는 오늘날의 고임음식과 닮은 것이 놓였다. 아마도 강정·산자·밤 따위를 고임한 곡아주의 안주가 아닐까 여겨진다. 일본의 고대 기록에는 이런 고임음식을 고구려병(高句麗餠)이라 불렀다고 적혀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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